연구회 소개
연구 방향
연구회가 무엇을 어떤 순서로 다루려 하는지 밝힙니다.
같은 낱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쓰면서 논의가 이어지면, 오가는 문장은 늘어나도 확인되는 사실은 늘지 않습니다. 의료일원화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개념 정의가 생략된 채 각자의 전제 위에서 말이 오가며 논점이 어긋나는 일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연구회는 무엇을 연구할 것인지를 말하기 전에, 논의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부터 정리합니다.
'의료일원화'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
제도 개편을 논하는 자리에서 '의료일원화'라는 말이 자주 쓰입니다. 그런데 이 한 단어가 서로 전혀 다른 제도를 동시에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 논의에서는 면허 자체를 하나로 합치는 것을 뜻하고, 다른 논의에서는 면허는 그대로 두고 권한만 같게 하는 것을 뜻하며, 또 다른 논의에서는 업무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히는 것을 뜻합니다. 지칭 대상이 서로 다른 채로 찬반을 주고받으면 논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연구회는 찬반을 논하기에 앞서 유형을 구분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아래 표는 논의의 좌표를 정리하기 위한 분류입니다. 각 유형이 현행 법령의 어디까지를 바꾸어야 하는지, 이행에 얼마의 기간과 비용이 드는지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먼저 유형을 나누어 놓지 않으면 비교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 유형 | 면허 | 권한 | 참조 제도 |
|---|---|---|---|
| 면허 통합형 | 단일 | 동일 | 단일 의사면허 체계 |
| 권한 통합형 | 복수 유지 | 동일 또는 준하는 수준 | 미국 D.O.(정골의학) |
| 업무범위 확대형 | 복수 유지 | 단계적 확대 | 중국·대만·홍콩의 중의 제도 |
| 현행 유지 | 복수 | 현행 | — |
연구회는 위 유형 가운데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네 유형은 모두 비교와 평가의 대상으로만 놓여 있으며,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택도 같은 자리에서 함께 비교합니다. 유형마다 개정해야 할 법령의 범위, 제도 이행에 걸리는 기간, 교육과 재정에 드는 비용, 이해관계자의 수용 가능성이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같은 기준으로 계량하여 제시하는 것이 연구회가 하려는 일이고, 어느 유형을 택할 것인가는 그 자료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결정입니다. 결론을 미리 정해 두면 그 뒤의 검토는 무엇을 확인하든 처음의 전제를 되풀이하는 데 그칩니다. 표의 '참조 제도' 칸은 비교할 대상을 가리키기 위하여 적어 둔 것입니다. 각국 제도의 실제 내용이 이 분류와 맞는지를 확인하는 일 자체가 해외 제도 비교 과제에 들어 있으며,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 의료 이용에서 출발한다
비교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지가 결론의 성격을 바꿉니다. 어느 직역에 어떤 권한을 줄 것인가에서 출발하면 그 답은 처음부터 이해관계의 배분표가 됩니다. 연구회는 출발점을 한 사람의 환자가 의료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겪는 문제에 둡니다. 그 문제는 대체로 의료가 분절되어 있는 데서 발생하고, 분절은 관념이 아니라 비용이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 정보 단절과 중복 검사 — 같은 환자의 영상·검사 결과가 기관 사이에서 공유되지 않아, 기관을 옮길 때마다 동일한 검사가 반복됩니다.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과 시간, 그리고 건강보험 재정이 함께 소모됩니다.
- 대기시간과 경과 지연 — 한 환자를 여러 기관·여러 의료인이 나누어 볼수록 전원과 회신에 걸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 사이에 확인되었어야 할 변화가 지나갑니다.
- 의뢰·회신 체계의 미비 — 누구에게 어떤 형식으로 의뢰하고 어떤 내용을 회신받아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의뢰는 개인적 관계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의 편차가 커집니다.
- 책임 소재의 분산 — 여러 주체가 한 환자를 함께 보는 구조에서 역할과 책임의 위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협진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실질적인 통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위 항목은 논의 과정에서 확인된 현장의 문제 제기이며, 연구회가 측정하거나 검증한 결과가 아닙니다. 분절이 초래하는 비용을 실증적으로 측정하는 일, 그리고 주치의 모델과 의뢰·회신 체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일은 앞으로 수행할 과제로 두었습니다. 교육, 면허제도, 의료기기·의약품 사용, 의료행위와 수가, 해외 제도 비교에 이르는 영역을 차례로 다루려는 것도 이 출발점에서 나온 순서입니다.
업무범위를 정하는 방식
분절은 정보와 인력의 차원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의료인 한 사람이 수행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가 어떻게 나뉘는지도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의료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경계를 정하는 데 쓰이는 판단 기준 자체에 먼저 검토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법령상 정의가 없는 개념이 판단 기준으로 쓰입니다
업무범위를 다투는 사건에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어 온 개념들이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특정 의학의 '원리'에 기초하는지를 묻는 방식, 그리고 의료체계가 둘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를 배경에 두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현행 의료법을 비롯한 보건의료 법령 어디에도 이들 개념에 관한 정의 규정은 없습니다. 법령이 정의하지 않은 개념이 실무에서 형성되어 판단 기준의 자리를 차지해 온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 둘 점이 있습니다. 이 개념들의 내용은 판단 기관이 스스로 구성한 것이라기보다, 교육기관과 학술단체·협회가 제출하거나 공표한 설명이 인용되어 채워져 온 측면이 있습니다. 개론서와 단체의 공식 서술이 규범적 판단의 재료가 되어 온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의 내용에 관한 책임도 상당 부분 의료계 자신에게 있으며, 기준을 다시 검토하는 일 역시 의료계와 학계가 맡아야 할 몫입니다.
기준이 대칭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같은 성격의 기준이라면 적용 대상에 따라 다르게 작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의학의 원리에 기초하는가'라는 물음이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게 제기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전인적·통합적 접근을 특정 의학의 표지로 본다면, 다른 영역에서 동일한 접근이 이루어질 때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어야 일관성이 유지됩니다.
이는 어느 직역이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는 문제 제기가 아닙니다. 판단 기준이 대칭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면 그 기준은 사안을 가르는 기준으로서의 명확성과 평등성을 갖추기 어렵다는, 기준 자체에 관한 규범적 문제입니다. 연구회는 이 문제를 개별 사건의 당부가 아니라 기준의 구조에 관한 문제로 다룹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건번호를 특정하여 인용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처벌의 구성요건이 불확정 개념에 의존합니다
업무범위 위반은 행정처분에 그치지 않고 형사처벌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판단에 쓰이는 개념은 형벌법규의 구성요건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요소가 됩니다. 법령상 정의가 없고 그 내용이 외부의 설명에 의하여 채워지는 개념이 처벌 여부를 가르는 위치에 놓여 있다면, 이는 명확성 원칙의 관점에서 검토를 요하는 구조입니다.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미리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의료 영역에서도 달리 적용되지 않습니다.
업무범위가 개별 사건을 통하여 사후적으로 결정되는 구조가 갖는 한계와 사전에 예측할 수 있는 제도화의 필요성은 연구회의 첫 모임에서 고윤근(대한공중보건한의사협의회 법제고문)의 발표로 다루어졌습니다.
원리와 도구의 구분
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연구회가 검토하고 있는 관점 하나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둡니다. 원리와 도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원리와 과학적 수단(도구)을 분리하고, 과학적 수단은 어느 의학에도 귀속되지 않는 중립적 도구로 놓습니다. 원리는 그 도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방향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한정합니다.
영상 장비, 검사 방법, 약물의 작용 기전에 관한 지식은 그 자체로 어느 의학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특정 이론 체계에 귀속되어 성립한 것이 아니라, 관찰과 검증의 절차를 통하여 축적된 공용의 수단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면 원리는 그 수단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곧 지향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한정됩니다.
이 구분이 성립하면 판단의 물음이 바뀝니다. 특정 기기·검사·약물의 사용 가부를 정할 때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느 의학의 것인가'가 아니라 '사용자가 그 도구를 안전하게 다룰 교육과 역량을 갖추었는가'가 됩니다. 앞의 물음은 법령상 정의가 없는 개념에 의존하지만, 뒤의 물음은 교육과정과 평가라는 확인 가능한 자료 위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판단의 근거를 확인 가능한 자료로 옮기는 것이 이 구분의 실익입니다. 개별 기기를 둘러싸고 형성되어 온 판단의 사례는 첫 모임에서 류의성(한의재택의료학회 교육부장)의 발표로 정리되었습니다.
다만 이 관점 역시 검토하고 있는 틀이며 결론이 아닙니다. 어떤 도구를 안전하게 다루기 위하여 필요한 교육의 내용과 분량을 무엇으로 산정할 것인지, 그 산정을 누가 어떤 절차로 수행할 것인지가 함께 설계되지 않으면 이 구분은 실무에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교육과정의 실측과 평가 체계의 설계를 연구 아젠다의 앞자리에 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정리는 연구회의 출발점이며, 완성된 결론이 아닙니다. 위의 유형 구분과 검토 틀은 첫 모임에서 정리된 것으로, 앞으로의 논의를 통하여 다듬어 나갈 예정입니다. 유형을 나누는 방식, 용어의 선택, 검토의 순서에 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시다면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비판과 반론은 연구회가 개념을 정교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의견은 전자우편 kamiu.or.kr@gmail.com으로 주시면 됩니다.
위의 방향에서 도출되는 개별 연구 과제는 연구 아젠다에 영역별로 정리하였습니다.